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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대정신과 건설산업, 성장의 언어에서 존재의 언어로 / 김한수 세종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이름 관리자 이메일  bbanlee@kfcc.or.kr
작성일 2026-03-31 조회수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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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산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는 종종 뒤를 돌아보며 과거의 영광을 되짚어 보곤 합니다. 건설이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축이었던 시절, 국토를 일구고 국가를 세운다는 자부심이 충만했던 순간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득 현실로 돌아오면 답답한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분명 시장의 규모는 커졌고 기술은 한층 정교하게 진보했음에도, 건설산업의 위상은 왜 과거보다 초라해졌는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 해답의 단서를 ‘시대정신’이라는 화두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시대정신을 읽는 힘: 산업의 미래를 여는 사유의 동력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 시대정신은 독일 철학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한 시대를 지배하는 의식과 가치, 집단적 사유의 구조를 뜻합니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짓는 핵심 지표가 되어 왔습니다. 시대정신은 관념적 담론에 머물지 않고 산업의 명운을 좌우하는 실질적 동력이 됩니다. 디지털 전환이 일상과 시장의 판도를 재편했듯, 오늘날 ‘탄소중립’과 ‘지속가능성’은 지구적 차원의 규범이자 피할 수 없는 가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기술적 차원을 넘어, 산업이 존재 방식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한 본질적인 사유의 힘입니다. 1970~80년대 건설산업의 번영을 단지 ‘운 좋았던 시대적 배경’ 덕으로만 치부한다면, 산업은 환경에 휩쓸리는 수동적 존재로 축소됩니다.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그것과 공명(共鳴)하는 힘이야말로 산업이 스스로의 길을 주체적으로 개척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입니다.


언어의 불일치: 성장의 논리와 삶의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

 

한 시대의 사유는 결국 삶의 현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건설은 시대적 의지와 꿈이 가장 선명하게 투영된 장면이었습니다. 전후 재건기의 건설은 ‘생존’ 그 자체였으며, 폐허 위에 다리를 놓고 집을 짓는 일은 공동체의 존엄을 회복하는 성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에 접어든 건설은 극명한 양면성을 드러냈습니다. 

 

속도와 효율이 절대적 미덕으로 추앙받는 사이, 건설은 삶이라는 본질보다 수치와 물량을 앞세우는 기계적 산업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압축적 성장의 끝에 “과연 이 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라는 뼈아픈 질문이 남았습니다. 이때부터 사회는 ‘삶의 질’과 ‘공정성’의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산업은 여전히 과거의 문법인 ‘생산’과 ‘기술’의 논리로 자신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기술적 성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산업과 그 이면의 윤리를 묻는 사회 사이의 균열이 깊어지면서, 건설은 이제 시대정신의 거울이 아니라 엄중한 시대적 응답을 요구받는 성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단절된 소통과 신뢰의 침식: 건설산업이 잃어버린 감수성

 

이 균열의 본질적 원인은 건설산업이 변화된 사회의 언어를 해석하고 번역해내는 감수성을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과거 산업과 사회는 성장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공유했으나, 사회가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산업은 여전히 차가운 구조물의 언어에만 머물렀습니다. 경제 논리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면서 환경과 안전을 담아낼 윤리의 언어, 조직과 사람을 유연하게 잇는 문화의 언어, 그리고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신뢰의 언어는 설 자리를 잃고 밀려났습니다.

 

산업이 결과물을 화려한 수치로 제시할수록, 사회는 그 공허한 숫자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표정과 실종된 책임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는 ‘얼마나 더’가 아닌 ‘어떤 가치를 지키며’를 묻지만, 산업은 이를 해소해야 할 규제나 비용으로만 치부하며 불편해합니다. 과거의 성공 경험이 신념이 아닌 고착된 관성으로 남으면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산업의 언어를 더욱 경직시켰습니다. 산업의 성취가 사회적 언어로 온전하게 번역되어 전달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견고한 구조물이라도 신뢰라는 기초가 결여된 '차가운 콘크리트'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관계의 구축: 기술을 넘어 시대의 가치를 설계하는 일

 

단절된 의미의 고리를 다시 잇는 일은 기술의 정교화가 아니라 언어의 근본적인 재구성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제 건설산업은 시대의 언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단계를 넘어, 사회의 질문에 귀 기울이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승화시키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본래 ‘짓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물리적 구조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의 틀을 직조하는 일입니다. 건설산업이 스스로를 어떤 언어로 정의하느냐는 곧 그 산업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자 하는가에 대한 실존적 대답이 될 것입니다.


이제 안전은 시공의 조건이 아닌 인권의 최소치로, 품질은 기술적 규격이 아닌 신뢰의 반복 가능성으로, 환경은 세대 간의 윤리적 계약이라는 사회적 약속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산업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고통스러운 성찰의 과정입니다. 건설의 사명은 단순한 공간과 시설물 창출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회의 기억을 담고 미래 세대의 삶을 지탱할 토대를 준비하는 사유의 길 끝에서, 건설은 비로소 구조물을 넘어 시대적 가치와 신뢰를 구축하는 사회적 가치 산업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건설산업, 그 힘찬 여정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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